Yunjeong Keum
9 min readOct 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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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체를 만든 이유

다양한 크리에이티브의 경험들을 통찰하며 효율적으로 적용하여 총체적 경험을 지향하는 레귤러볼드(Holistic Experience Company, RegularBold)에서 처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상하며 이 모든 경험의 기본 요소인 글자, 특히 한글에 체계적인 시스템을 적용하여 다양하게 사용하기 위해 서체를 만들었다.

레귤러볼드라는 이름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텍스트 내용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속에서 강조해야 할 부분과 생략해야 할 부분을 찾아내는 행위를 상징하며 가장 기본적인 내용에서 본질을 파악하고 핵심을 꺼내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여 이름지었다.

로고스케치 역시 이름의 속성인 R과 B를 보니 기본과 혁신은 한끗차이라는 생각에 같지만 다른, 멀지만 가까운 모습을 표현하려했다. 형태적으로도 가로와 세로의 획의 대비를 크게 주지만 레귤러에서 점점 볼드로 연결되는 모습에서 기본과 혁신의 필연적 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레귤러볼드 로고의 형태와 특징을 살려서 2017년 초기에 영문 도안을 만들었고 이어서 한글 폰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지만 서체 디자인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여 엄두가 나지 않았고 전문성이 결여된 품질의 결과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영문 또한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 기본 작도에 의지하며 만든 것이라 디테일하게 보면 엉성한 곳이 많아 서체의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시작에 의미를 두고 볼품없는 결과물이라도 만족하며 그렇게 그치는 듯 하다가 이런저런 다른 프로젝트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했던 계기는 경험을 이론으로 정립하는 Design by Num6ers에서 시작되었다. 2년 동안 총체적 경험을 위한 라이브 디자인 시스템을 연구하며 기본 가이드 ‘REGO’를 만들었지만 기대 만큼 실제 프로젝트에서 활용성이 높지 않아 더욱 진화한 개념으로 라이브 디자인 시스템을 구상하게 되었다.

UX를 포함한 정보위주의 디자인은 기본적 정보를 다시 배치하고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고 정돈한다는 개념이 강한, 사후 처리 방식이다. 하지만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보 디자인은 보다 빠르고 즉각적인 방식을 필요로 한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증발하는 뉴스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소통에서, 지금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로 생성되고 소멸되는데 이 순간을 포착하거나 찰나를 붙잡아 디자인하는 시스템이 없는 지금의 현실은 항상 뒤늦은 결과만 보게 된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 비꼬듯이 전문성을 이야기하며 돈은 없어도 퀄리티는 포기 못하는 고집을 가진 책임자를 만나는 디자이너들은 그 빈틈을 시간과 노력만으로 극복해야 하니 이제 점점 그로기 상태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결정된 요구사항도 프로젝트 진행중에 빈번하게 변경되며 그와중에 새로운 요구사항이 끊임없이 발생되면 그 많은 방법론들이 무색해진다.

우리 주변의 급박한 기술진화와 함께 사용자 경험도 일단위로 변하고 있으며 그에 동조하는 디자인 트렌드들도 우후죽순 현혹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디자인의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일부 노련한 디자이너의 경험에 기대거나 여유로운 시간, 혹은 많은 인력과 자산을 쌓은 경우가 아니면 어림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머신러닝, 데이터 마이닝 등 기술의 진보는 인간을 더욱 편하게 만들지만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훨씬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현실에서 최소한 반복적인 작업만이라도 자동화해보자는 발상의 결과가 라이브 디자인 시스템이며 현재진행형이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의 목표와 의도, 요구사항 등이 실제적이고 즉각적으로 화학반응하고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자동으로 진화가 가능하다면 결과물을 한눈에 파악하고 쉽게 테스트하며 품질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디자인에 규칙이라는 것이 품질을 보증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오류를 방지하며 오랜 기간동안 검증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는 디자인의 기본에 대한 법칙은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 법칙들이 다양한 내외부 요인과 접촉하여 수많은 선택지를 생성하고 이것들을 선택하는 것이 곧 디자이너의 역할이 된다면 디자이너는 더 깊고도 넓어질 것이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쉽게 적용할 엄두가 안나 전통적인 프로세스를 따라가다 중도에 포기하는 안타까움은 더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 개념을 테스트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모색하던 중 영문만 만들고 방치했던 한글서체를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고 한글의 우수한 조합성은 시스템을 적용해보기 좋은 요소라고 판단했다. 하나의 결과물을 온전히 만들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고 혼자 작업해야 하며 그것도 본업에서 틈날 때만 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해서 연결성이 있는 대상으로 한글을 선택했다. 특히 한글은 창제원리가 지금의 그 어떤 디자인시스템에 비춰서도 월등히 명확하고 체계적이다. 다른 디자이너가 한글을 만드는 두려움은 체계 안에서도 엄격한 내공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되는 작업량 때문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한글은 도전과제로 충분한 요건을 충족시켰다.

디자인룰을 설정할 때 중요한 것은 서로의 관계성인데 성격이 다른 것들이 뒤섞여 있다면 논리적으로 관계의 변화와 적응을 설정하기 어려워 강제성을 띠게 되는데 이런 부분들은 룰 바깥에 둘 수밖에 없어 예외성이 많아지는 단점이 있다.

한글은 ㄱㄴㄷㄹㅁㅂ… 자음과 ㅏㅑㅓㅕㅐㅔㅒ…모음끼리 서로의 관계성이 명확하고 의미의 형상화도 가장 단순하게 표현되어 현대의 기술과 접목하여 보다 쉽고 빠르게 다양한 형태를 반영한 결과를 기대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런 낱요소들이 모여가며 의미를 이루고 그안에 맥락을 담는 과정이 우리의 디자인 과정과도 다르지 않다.

원리가 명확하니 서체의 표정에 따라 룰의 엄격성에 대한 선택이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인 룰을 정하고 그래픽, 헤드라인, 본문 등 다양한 의도와 원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부적인 룰을 추가하며 테스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 서체의 특징

영문과 마찬가지로 레귤러와 볼드라는 강한 대비를 살리고 최소한의 세리프 요소를 가진 한글 기본 컴포넌트에서 파생된 초성19, 중성21, 종성27의 조합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한글만의 형태와 조합원리를 분석하며 공통과 예외 규칙을 수립하고 57개의 컴포넌트로 넓이(W), 높이(H), 위치(X,Y), 두께(D), 모양(T) 등으로 5가지 속성을 부여하고 가로형, 세로형 등 조합성에 따라 변주하여 다양한 글자가 자동으로 생성되어 한글 제작 시간을 단축했고 이 서체시스템을 기본으로 기본 컴포넌트만 변주한다면 빠르게 원하는 스타일의 서체를 제작할 수 있다.

두께또한 가장 얇은것과 가장 두꺼운 부분만 설정하여 그 사이의 모든 두께를 자동으로 생성하게 하며 사용하는 디자이너가 그래픽 프로그램에서 두께를 숫자 단위로 바꿀 수 있는 가변글꼴(Variable Font)이다.

조합을 통한 모든 글자가 있으며 두께가 다른 여덟 가지 패밀리가 있다. 자동 조합과 약간의 추가 규칙만 적용하여 글자들의 완성도는 획이 많아질수록 떨어진다. 전문 디자이너의 노하우와 프로그래밍을 안다면 세부적인 규칙을 설정하면 해결되겠지만 영역을 더 넘기 보단 이제 디자인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글과 말은 우리의 모든 정보를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며 디자인에서도 텍스트를 다루는 것은 기본이다. 디자인을 20년 넘게 하면서도 처음 글자를 디자인하며 이 작은 한 글자안에 세상이 있고 디자인의 원리가 있음을 느꼈다.

나와 레귤러볼드의 그 어떤 디자이너도 서체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번 체험을 통해 성장했고 작업 과정을 공유한 레귤러볼드 디자이너들도 분명 도움이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씨 만큼은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다.

다른 영역의 디자이너들도 글자, 특히 한글을 디자인하고 글씨를 직접 디자인에 활용해 보면 작지만 큰 세상의 신비한 체험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어차피 가독성을 위한 폰트는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아이덴티티를 위한 사용이라면 얼마든지 개성을 살려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서체는 제작 완성하여 배포하는 방식이지만 앞으로는 서체를 사용하는 사람 위주로 몇가지 선택을 하면 원하는 스타일이 완성되고 변화하며 디자인툴처럼 기본시스템은 언제든지 업데이트 가능한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 예상한다.

우리의 글꼴 프로젝트도 지속적으로 시스템을 발전시킬 것이며 시스템의 토대위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서체 디자인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그래서 서체명도 첼로와 피아노, 기타와 같은 일련의 악기명으로 설정하여 궁극적으로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기를 희망한다. 바로 다음은 RegularBold Piano의 이름처럼 직선의 느낌을 살린 서체를 만들 계획이다.

이 서체의 사용

맥에서 제작해서 윈도우 시스템의 지원여부는 알 수 없다. 만자가 넘는 한글 조합글자가 있는 풀버전과 이천자의 기본버전을 따로 다운받을 수 있다. 가변서체는 기본버전만 가능하고 하나의 TTF 형식이라 가볍게 사용해보려면 기본버전을 다운받는 것이 좋다. 아이덴티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서 만든 서체이기 때문에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만든 사람의 느낌으로 ㅊ이 들어가는 단어는 어색하니 피하는게 좋겠다. ㄱㅋ, ㅇㅎ, ㅅㅈㅊ은 모두 하나의 원형 ㄱ, ㅇ, ㅅ을 기반으로 하니 어색한데 추후 업데이트시에 별도 분리하면 완성도가 높아질 것 같다. 가변서체는 포토샵, 일러스트, 스케치 현재 버전에서 지원한다.

Font Name ; RegularBold Cello
Company ; RegularBold
Designer ; 금윤정
Tool ; Adobe Illustration, Sketch, Glyphs
File ; Full, Basic

RegularBold Cello 서체의 지적재산권은 RegularBold에게 있으며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수정하고 재배포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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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jeong Keum

RegularBold Creative Direator & CCO, VinylC UX Center, Innovation Lab, Creative Director(2003~2015)